장군 농부 류성식

이천 고래실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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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쌀의 명성


쌀은 우리 민족과 5000년 역사를 함께한 가장 큰 원동력이다. 한반도에서 벼농사는 충청북도 소로리에서 세계 최초로 추정되는 1만 5000년 전의 볍씨가 발견되었을 만큼 역사가 길다. 삼국시대에 들어서는 백제와 신라가 쌀 생산을 국가 차원에서 장려했고, 고려시대에 이르면 쌀은 물가의 기준이자 봉급으로 사용되었다. 귀족 계층들만 먹을 수 있었던 쌀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벼농사를 장려하는 국가 시책을 통해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우리 민족의 주식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쌀로 지은 밥을 잘 먹기 위한 방편으로 간장, 된장, 김치 같은 발효 음식이 만들어졌기에 쌀은 우리 식문화의 주인공이다. 


경기도 이천은 예부터 임금님께 진상하는 좋은 쌀의 생산지로 알려져 있다. 이천 쌀이 이렇게 특별한 것은 천혜의 자연환경 덕분이다. 이천 지역은 전형적인 분지 지형으로 남한강 유역의 들과 산지가 만나는 땅으로 벼 농사에 적합하다. 풍부한 일조량과 강수량, 큰 기온교차 등 기후적으로 벼의 생육에 좋은 조건이며, 물과 땅은 각종 미네랄을 함유한 무기질 농도가 높아 성분 좋은 쌀을 만들어 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이천 쌀이 좋고, 임금님 진상미가 됐다는 기록이 있어 이천 쌀의 역사와 명성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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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리미엄 시대의 새로운 기준


경제가 성장하면서 서구화된 식생활과 쌀을 대체하는 먹거리들이 풍부해진 탓에 한국인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1970년대 130 – 140kg에서 지난해(2019년) 59.2kg으로 감소했다. 쌀 섭취량은 줄어든 반면, 고품질과 편리함이 새로운 쌀 소비 트렌드가 되었다. 오랜 기간 한국인들에게 좋은 쌀의 기준은 특정 지역에서 키워진 쌀이었다. 그 다음으론  밥 맛 좋다는 품종에 대한 주부들의 인식이 선택 기준이 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최고 품질의 쌀을 소량 구매하는 것이 시대의 기준이 되었다. 최고 품질이란 특정 지역에서 한 단계 더 들어가 어떤 논에서 키워진 벼를 어떻게 쌀 상품을 만들고, 제 때 소비자들에게 공급하는가가 편리미엄 시대의 새로운 기준, 뉴 노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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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도둑 고래실미


농업회사법인 ㈜1893은 고래실 논에서 키운 쌀을 판매한다. 고래실 논은 ‘골짜기에 있어 바닥이 깊고 물이 풍부해 기름진 논’을 말한다. 이천 지역 고래실 논은 진흙이 깊어 발이 빠지면 혼자 힘으로 나오기 어렵다. 벼를 베는 기계 콤바인 조차 움직이기 쉽지 않은 이런 논에서 키워진 밥 맛 뛰어난 품종의 벼를 수확해 정미소 창고에 보관한다. 소비자가 주문을 하면 그 즉시 도정해 2kg 단위로 포장된 쌀을 보내준다. 밥을 지으면 찹쌀처럼 윤기가 있고, 입안에서 고소한 단맛과 향이 감돈다. 식감 또한 뛰어나 고래미실미 스스로 밥도둑이란 말이 어울린다. 

놀라운 것은 이런 차별화된 방법으로 상품화한 특품 고래실미의 가격이 농민들로부터 대규모로 수매 판매하는 농협 쌀 보다 오히려 10 – 20% 저렴하다. 비결을 묻자 오랜 군 생활이 몸에 밴 유 대표의 명쾌한 답변 “고래실미 20kg을 7만원에 판매한다. 밥 한공기를 130g으로 보면 455원 가격이다. 이 금액으로 맛있는 한끼 식사가 가능한 일을 사업으로 했으면 한다. 중간 유통 비용을 줄이면 농부들에게는 좋은 가격으로 수매하고, 주부들에게는 가치를 줄 수 있다” 

류대표의 어린 시절 율면(栗面) 인구는 10,000명 정도였다. 지금은 2,800여명의 노인들과 500명가량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일하는 곳에 젊은이들은 없고, 농업은 점점 더 어려워지는 지역으로 변했다. 이 곳에서 새로 출발하는 농업회사법인은 당장의 이윤 창출 보다는 농업과 지역을 생각하는 오래된 미래를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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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fé 1893


류성식 대표가 귀향한 이천시 율면 고월로는 경기도 최남단 땅끝이다. 류 대표가 태어난 고향 집은 조부가 지은 집으로 대들보에 1893년의 연호가 붓글씨로 남아있다. 류 대표와 부인 허성숙씨는 127년 오랜 집을 보수해 멋진 카페로 꾸몄다. ㄱ 자(字) 모양의 작은 집은 응접실, 회의실, 화랑, 침실이 모두 마당을 내다보는 구조로 되어 있고, 마당엔 경계가 없어 멀리 충청도와 맞닿은 앞산까지 공간을 확장한다. 각각의 방에는 품격있는 그림과 꼭 필요한 소품들이 저 마다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건축가들이 말하는 작은 집의 공간을 나누면 무한히 확장된다고 하는 것이 이 집에선 빈말이 아니다. 

농업회사법인 ㈜1893은 이천 땅에서 생산되는 복숭아, 쌀, 꿀, 참기름, 들기름 등을 상품화하고, 다른 지역의 좋은 농부들이 생산한 좋은 식재료들도 함께 취급한다. 부부의 뜻을 공감하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이 곳에 들러 마음 나누며 편하게 쉬어 갈 수 있다. 굿푸드의 시작은 굿피플이다.


장군 농부 류성식

류성식 대표의 전직은 군인이다. 1979년 육군사관학교 39기로 입학해, 1983년 육군소위 임관 후 38년 군 생활을 마치고 2017년 1월 육군 소장으로 전역했다. 예편 후 곧바로 경기도 이천시 율면 고향으로 돌아와 그가 태어난 옛집을 보수해 터를 잡는다. 평생을 군인으로 나라를 위해 봉사했고, 이제는 고향을 위해 가치있는 일을 찾는 것이 세컨드 라이프의 과제였다. 그가 찾아낸 답은 “이천 농산물은 쌀과 복숭아가 유명합니다…”에서였다. 

부친이 남긴 복숭아 과수원을 가꾸며, 이천에서 생산되는 좋은 쌀을 선별해 도시 소비자들에게 최상의 품질로 보내줄 방법을 궁리한다. 3년 준비 끝에 지난 5월 ‘농업회사법인 ㈜1893’을 출범했다. 군 시절 수천명 부하들을 지휘하던 장군은 몇 사람 마음 맞는 동료들과 이천을 대표하는 좋은 쌀을 진정한 ‘Good Food’로 만들기 위한 일을 시작했다. 쌀의 가치를 높이고, 지역을 활성화시켜 농촌과 고향을 위하는 일이다. 아름다운 귀향이고, 장군에서 농부로 두 번째 인생의 ‘휴먼 업사이클링’이다.